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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 2003년 8월 8일

 

상주 동학교당  
국가지정 전통건축물 제10호인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은 현소유자 김덕룡(金德龍, 1987. 5. 사망)의 부친인 김주희(金周熙, 1860∼1940, 동학교의 남접부(南接主))가 1915년 이곳에 본거지로 정하고 동학교의 부흥과 포교에 노력하다 1916년 이곳에 교당을 건축하고 전도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는 등 교세확장에 힘쓴 본부로서 은척면 우기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넓은 분지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 깊숙히 남향으로 자리잡았다.

건물의 구조는 일반형이며 목제는 당시의 교세의 영세성을 입증하듯 여러곳에서 헌집을 헐어 세운 듯하나, 가옥배치 유형이 트인 ㅁ형으로 이런 것을 태극체(太極體) 또는 음양체(陰陽體)라고 한다. 중심 건물인 원채에는 성실채로, 동재에는 접주실(接主室), 서재에는 남녀교우(敎友)가 각기 반분씩 사용하며 남재에는 남교우(南敎友)가 거쳐 하였다. 원채 이외의 3동의 건물은 각각 2분하여 좌·우가 방향을 180˚ 또는 90˚로 달리하여 정면을 이루고 있다. 건립 당시는 모든 가옥이 초가 지붕이었으나 16여 년 전 천연스레트(石材)로 지붕을 바꾸었다. 그 후 1987년 서재만을 원형인 초가(草家) 지붕으로 개수(改修) 하고, 1989년 모두 보수했다.
1367평의 대지에 총건평은 71.1평으로서,
☞ 원채(북재(北齋), 성체실(聖體室)) 15.8평
☞ 행랑채(남재(南齋, 삼성경재(三省敬齋)) 17.9평
☞ 사랑채(동재(東齋, 성신경재(誠信敬劑)) 15평
☞ 안사랑채(서재(西齋, 접빈실(接賓室)) 18평
☞ 곡간채 5평
☞ 상마석(上馬石)과 하마석(下馬石)
☞ 깃대곳이 돌 2석(石) 이 있다.
전시관에는 동학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건물의 특성
입지(立地)와 좌향(坐向)
어떤 장소에 정주(定住)한다든지 어떤 공간에 거주한다는 것 등은 우주 창조의 반복으로 종교적(宗敎的 인간에게 있어서 공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모든 실존적 결단은 곧 사실상 하나의 종교적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단지 카오스(Cahas)를 코스모스(Cosmos)화(化)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화(聖化)하여 신적(神的)인 세계에서 거주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교당(敎堂)은 사방(四方)이 산(山)으로 둘러쌓여 작은 분지를 이룬 은척면 우기리는 25개성(個姓)의 100여 호(戶)의 집촌(集村)으로 마을의 중심부에 교당이 있고 주위에 민가(民家)가 배치되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교당은 주위의 지형 지세를 동학교적 논리로 해석하여 서쪽 칠봉산(七峰山)과 그 주변 산들에 의해 형성된 산정자형(山丁字型) 산세(山勢)와 마을의 동남(東南)쪽 각(角)에서 합수(合水)하여 동남향으로 흐르는 물 흐름의 정자형(丁字型) 수세(水勢)가 합치된 산정수정(山丁水丁)의 선천형국(先天形局)의 아자형(亞字型) 지세(地勢)의 중앙(中央)에 위치한다. 그들의 「궁을경(弓乙經)」에서 선천(先天)의 원형으로 상징되는 아자(亞字)의 안쪽 백십자(白十字)의 한 가운데에 교당이 위치하여 양(陽)의 극치에 의한 선천회복(先天回復)의 운(運)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당의 좌향(坐向)은 상량문(上樑文)에 건좌손향(乾坐巽向)은 남동향의 집으로 양택론(陽宅論)에 따른 배치와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공간구성과 배치
종교건축에 있어서의 공간 구성과 배치형식은 각 종교 고유의 교의(敎義)와 사상적 체계에 의해 경정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본 교당은 원채(북재(北齋))와 남재(南齋)를 연결하는 주축선과 동·서재를 연결하는 부축선이 직교하는 직교축형의 기하학적 대칭형의 중정식 배치형식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남재(南齋)와 전면(前面) 골목 사이에는 넓은 마당이 형성되어 있어 교도(敎徒)들의 출입(出入)과 하마(下馬)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공간의 성격상 교도들간의 일차적(一次的) 만남이나 집회 및 제의(祭義)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장소로 전위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강한 중심성(中心性)을 갖는 중정식 튼 ㅁ자형 배치의 정형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주택을 비롯한 불사(佛寺), 서원(書院), 향교(鄕校)의 여러 전통건축에서 그 배치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상기(上記) 전통건축(傳統建築)의 형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건축된 것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배치 형식이 동학교(東學敎) 교의(敎義)에서 선천세계(先天世界)를 상징한 아자(亞字)를 표상하는데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또 남재(南齋) 배면(背面)에는 약 5m쯤 떨어져서 맞담을 축조하였다. 이는 음력 4月 5日 최제우의 득도일을 맞아 천도순지도(天道循之圖)에 따라 중정에 교기(敎旗)를 꽂고 제의(祭義)를 진행할 때 공간의 폐쇄성과 위요감을 부여하여 신성한 종교적 분기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동학교 교당의 건물배치 및 명칭은 유교적 전통사회의 가치관과 건축적 수법에 연유하나 건축물의 조형적 물리적 표현은 교의에 대한 철저한 연역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당 출입은 당시의 내외 구별의식에 따라 남교도(男敎徒)들은 남제의 대문(大門)을, 여교도(女敎徒)들은 서재 뒷편에 위치한 후문(後門)과 중문(中門)을 통하여 교당으로 출입하였다. 이는 당시까지도 사회전반(社會全般)에 남아 있던 남녀유별이라는 윤리관에 의한 시대적(時代的) 한계로 짐작된다. 또한 교당 주위에 동학교를 상징하는 석류 및 목단나무 등을 주로 심어 교당을 인식적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교당은 동학교의 자연관 및 우주관이 그대로 반영된 성스러운 공간일 뿐만 아니라 중심과 장소, 방향과 통로, 영역의 요소를 갖는 실존적 공간이라 하겠다.


평면형식
가. 원채(北齋)
헌성공간(獻誠空間)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의 겹집 평면이다. 좌측간(左側間)과 중앙간(中央間)에 전후 각각 2칸통의 부엌과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에 연접해서 좌측간에는 전후 2間의 헌성실(獻誠室)을 두었는데 가운데 4분합미서기문에 의해 향배설립(向拜設立)의 청수상(淸水床)과 1칸과 1칸의 예배실로 구분되어 있다.
원채의 평면형식은 동해안의 강릉에서 울진까지의 태백산맥 주변 농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6칸의 온돌중심형 겹집과 유사하다. 6칸 온돌 중심의 겹집은 4칸의 방이 각각 안방과 뒷방 및 사랑과 도장 위치에 헌성실(獻誠室)이 놓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원채는 6칸 온돌 중심형 겹집과 같은 중풍(重豊)계층의 집을 원형으로 하여 변형시킨 평면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채의 평면구성이 6칸 온돌중심형 겹집임을 상주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주변의 겹집계 주문화권(住文化圈) 외곽에 놓여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東齋(상랑채)
동재는 정면 5칸, 측면 반칸 가운데 교주(敎主) 김주희(金周熙)가 거쳐하던 온돌바닥의 접주실을 두고, 그 북쪽으로 1칸 마루와 래객(來客)을 접빈했던 응접실이 위치한다. 또한 접수실에 접해서 남(南)으로 칸반의 각판실(刻板室)이 있어 이 곳에 방대한 가사(歌辭)를 이곳에서 간행(刊行)하였다.
남향한 반간(半間)의 툇마루 안쪽위에는 성(誠)·경(敬)·신재(信齋)라는 편액(扁額)이 걸려있는데 이는 그들의 최고 윤리로 동재(東齋)의 공간적 위계가 타건물에 비해 월등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동재(東齋)는 접주실(接主室)과 응접실이 북동향하는 한편 각판실은 남서향하여 도상적(圖像的)으로 180˚C 분절된 평면과 입면을 구성하고 있어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한국 전통건축이 일반적으로 일면의 정면만으로 구성된 경우와는 달리 이면(二面)의 정면(正面)을 가지고 있어 좋은 재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평면구성 방법은 창건(創建) 당시 교의에 따라 의도된 것으로 동학교에는 이를 태극(太極)체 또는 음양(陰陽)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동학교에서 음양의 조화와 상생(相生)관계로 선천(先天)의 조화로운 세계를 모방할려는 의식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 西齋(안사랑채)
주로 남녀 교도들이 거쳐하는 집으로 정면 4칸반, 측면 2칸 통간(通間)의 부엌을 두고 그에 접하여 2칸 규모의 여교우실(女敎友室)을 두었는데 방 가운데 흙벽을 치고 외여닫이문을 달아 방(房)을 둘로 구분하였다.여기에 접하여 앞뒤 2間의 온돌바닥의 남교우실(男敎友室)을 두고 가운데 흙벽을 치고 외여닫이문을 닫었다.
여교우실(女敎友室)과 남교우실(男敎友室) 정면에는 각각 정면 2칸, 측면 반칸의 뒷마루가 90˚ 틀어져 시설되어 있다. 이와 같이 여교우실과 남교우실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고 또한 툇마루와 정면 출입문마져 90˚ 틀어져 위치하는 평면구성(平面構成)은 당시 사회전반에 존재한 가치관(價値觀)이며 동학교의 사상이었던 남녀유별을 주어진 조건하에서 내부공간의 성적분화(性的分化)라는 건축적 수법으로 처리한 좋은 예라 하겠다. 뿐만아니라 이와 같은 평면구성기법은 동재와 같은 태극체 즉 상생의 원리에 따른 건축적 표현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라. 南齋(행랑채)
남재는 정면 6칸, 측면 칸반의 건물로 주로 부교주(副敎主)와 타지에서 온 남교도(男敎徒)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때로는 낮시간에 교도자제들에게 한문 및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남교도들이 침식하며 기거하던 우측 3칸의 중앙간(中央間) 전면(前面) 상부에는 삼성경재(三省敬齋)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고 또한 매(每)칸마다 4분합미서기문으로 구획하여 공간의 전용성(轉用性)을 높였다. 또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위치하고 그 중 우측방 전면에 루(樓)마루를 두고 양면에 난간동자와 띄장만으로 구성된 간단한 난간을 시설하였다.
좌측의 2칸은 곡간(穀間)과 마굿간 및 말여물 창고로 이용되었으며 그 우측에는 대문(大門)이 위치한다.
이상으로 볼 때 남재는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행랑체 기능을 확대 격상시켜 동학교에 맞게 변용한 건물로 사료된다. 또한 태극체 또는 음양체로 평면 및 입면을 구성한 건축적 표현은 남재에서도 나타난다. 즉 바깥마당을 향해 남동향을 한 온돌방과 중정(中庭)을 향한 곡간이 각각 180˚ 상반된 정면을 갖는 등 동·서재와 형태적, 구조적으로 유사하여 종교적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 기타 附屬建物
원채 우측 후원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판벽(板壁)으로 된 광이 있어 살림에 필요한 모든 기물(器物)과 일상용품(日常用品) 및 음식물을 보관하였다. 이 밖에도 서재 뒤쪽에 근년(近年)에 지은 부속건물이 있다.
또 광의 좌측 뒤쪽에는 내측(內厠)을, 동재, 전면 우측에는 외측(外厠)을 두어 남녀공간의 성적 분화가 뚜렷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채 좌측면 담에는 후문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이 있었고 중문과 후문 사이에 집을 지어 교당의 관리와 잔일을 하던 일가가 거쳐하도록 하였다. 이 집은 안동지방에 많이 존재하는 마루중심형 6칸 겹집으로 현재는 외부인이 사용하고 있다.


의 장
가. 지붕형태
원채를 비롯한 4동(棟)의 건물은 창건 당시에는 모두 초가(草家) 모임지붕의 형태로 건축되었다. 그 후 1960년 원채를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개수(改修)하였으나 잦은 누수로 1962년경에 원채를 비롯한 4棟의 건물을 모두 충북 보은군에서 생산되는 두께 5㎜ 가량의 천연스레트(돌기와)로 이었다고 한다. 현재 지붕형태는 東·西·南齋만 우진각 지붕일 뿐 원채는 개수과정에서 우진각지붕에서 팔작(八作)지붕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초기교당의 주요건물들이 모두 초가 우진각 초가지붕이었음은 동학교의 기반(基盤)이 가난한 평민들이었다는 사실과 초기에 미약한 교세(敎勢)에 영향을 받은 듯 민가의 의장적 요소가 교당건축(敎堂建築)에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 창호(窓戶)
한국 건축에서 정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窓戶의 의장(意匠)은 상당히 다양하여 정면의 정면구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학교 교당의 창호의장이 독특함은 동재의 접주실과 응접실의 4붐합 들문의 불발기와 미닫이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접주실에서 마루로 통하는 4분합 들문 가운데 두짝의 불발기에는 사각형(四角形)의 문울거미를 만들고 살을 양각(배밀이)하여 아자(亞字)로 짜넣은 반면 마주보는 응접실의 4분합 들문에는 음각(끌밀이) 한 亞字살로 불발기를 만들었다. 또한 접주실의 전면 미닫이문은 큰 亞字 살짜임 하나와 작은 亞字 살짜임 4개개 조합된 형태의 문으로 문두짝을 닫으면 도합 작은 亞字 10개와 큰 亞字 2개가 만들어지도록 의도되어 있다.
동재 창호의 이러한 문자무늬의 살짜임은 동학교에서 중시한는 「궁을경(弓乙經)」에 연유한다. 弓乙이란 정감록에 나오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도식어(圖識語)로서 최제우가 정감록의 도참사상을 동학에 수용하여 민중을 동학에로 끌어 들일 수 있었던 중요한 매가 된 것으로 天을 표상한다. 弓은 양(陽)이고 乙은 음(陰)이므로 弓乙은 곧 음양의 조화(造和)가 극치(極致)를 이루는 선천(先天)을 상징한다. 창호 살짜임 뿐만 아니라 살의 모양이 양각(배밀이) 또는 음각(골밀이)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접주실(接主室)은 모두 양지양(陽之陽)이며 응접실의 경우 불발기는 양지음(陽之陰)이고 미닫이 문은 음지음(陰之陰)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접주실과 응접실의 창호는 음양(陰陽)의 조화로운 상태를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살짜임과 살의 단면은 결국 동학교에서 주장하는 음양의 조화를 통한 선천회복운동(先天回復運動)을 조성하려는 종교적 상징성이 건축적으로 표현된 예라 하겠다.


기단형식
한국 건축에서 기단(基壇)은 중요한 의장적 요소 외에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채를 비롯한 東·西·南齋의 기단은 조선시대 중류주택(中流住宅)처럼 1尺 내외의 막돌허른층 쌓기 기단으로 되어 있다. 앞마당을 기준으로 하며 각 건물의 정면기단(正面基壇) 높이는 1尺 5寸이 기준으로 종교적 상징은 찾아볼 수 없다


구 조
교당(敎堂)의 주요 건물은 다듬지 않은 호박 주춧돌을 놓고 4寸 또는 5寸角의 각주(角住)를 세워 납도리와 사개맞춤한 위에 솥서가래를 얹어 지붕틀을 구성하였다. 도리를 보강하는 부재인 장혀는 정면성이 강조되는 곳에는 거의 다 사용되었으나 건물의 배면 및 부엌 등에서 대부분 생략되었다. 또한 상부가구(上部架構)는 대량(大樑) 위에 角 대공을 놓고 결구하였으며 원채를 비롯한 모든 건물이 3량가(樑架)로 가구되어 있다. 천장은 대부분 평교 미반자를 시설한 밑에 종이를 발라 마감하였다. 사용한 서까래의 미구(未口)크기는 직경 4寸 정도이고 서까래 간격은 35㎝ 정도이다. 서까래의 처마 길이는 전체가 99㎝이고, 동·서·남재가 각각 90, 86, 81㎝이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볼 때 교당은 당시의 평민(平民)들이 저주했던 주택을 원형으로 하였으며 재료 부족으로 인해 도괴의 부분적 사용이 불가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식적 표현도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 론
첫째, 입지의 선정 및 해석에는 학교적 논리에 따라 산정수정(山丁水丁)의 아자(亞字) 형국이 중요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실재적(實在的) 공간(空間)의 의미를 부여 상징화하였다.
둘째, 공간구성(空間構成) 및 배치(配置)는 교의(敎義)에 대한 연역적 해석에 의해 아자(亞字) 형성으로 구성하였으며 그 중심의 안마당은 제의(祭儀)의 장소로 중요시되었다.
셋째, 원채를 제외한 3동(棟)의 건물은 모두 태극체 또는 음양체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음양의 조화 및 상생(相生)관계를 중시하는 교의를 평면(平面), 입면구성(立面構成)에 적극적으로 표현한 결과라 하겠다.
넷째, 평면향식은 물론 지붕형태, 기단 및 구조 등 모든 건축의장적, 구조적 구성요소들은 중·서민주택에서 추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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